2002년 6월 17일 (월) / 한겨레신문
외국인 만나면 ‘꿀먹은 아이들’
경기 부천여고 2학년 학생들은 17~18일로 예정된 영어 시험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 학교에서 올해 처음 도입된 ‘영어로 말하기’ 수행평가가 즐겁기 때문이다. 지난 4월 평가에서 학생들은 1분30초 동안 학급 친구들 앞에서 자기 소개를 했다. 지금껏 배운 영어로 자신의 성격, 친구 관계, 미래의 꿈을 표현하면서 영어를 쓰는 즐거움을 발견한 것이다. 이번 6월 평가는 ‘18년 뒤의 내 모습’ 등이 주제인데 아이들은 사전에 발표문을 준비하느라 열심이다. 수행평가를 진행한 신영아 교사는 “교사한테서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하던 아이들에게 수업시간에 영어로 자기 표현을 하게 하니까 아이들도 무척 좋아한다”며 “영어는 이처럼 즐겁게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 아이들 대다수가 영어 공부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10년을 공부하고도 말 한마디 못한다.”
우리 중·고교 영어교육을 두고 항상 나오는 비판이다. 1997년 초등 3학년부터 영어가 정식 교과목으로 도입됨으로써 고3 때까지 모든 국민이 10년 동안 영어를 배우게 됐지만 아직도 대다수는 외국인 앞에 서면 벙어리가 된다.
원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중등 영어교육, 특히 고교에서는 말하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시험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를 외고, 수많은 연습문제를 풀어도 학생들한테는 ‘말할 기회’가 없다. ‘영어로 말하기’ 수행평가를 하는 부천여고의 경우도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으로 전체 점수의 10%밖에 반영하지 않는다.
빠른 세계화 추세 속에서 영어가 생존의 중요한 도구가 됐음에도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 보니 학교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학교교육만으로는 제대로 안되니 사회 전체를 영어학교로 만들자는 이른바 ‘영어 공용화’ 주장이나 ‘영어마을(잉글리시 존) 건설’이라는 선거공약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거침없이 제기되고 유통되는 이런 사회적 요구에 대해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전제가 잘못돼 있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사회적 환경이 영어에 친숙하게 변한다 해도 우리한테 영어는 외국어일 수밖에 없다. 국제교류가 늘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영화 등 미디어 환경이 ‘영어화’된다 해도 한계는 분명하다. 이런 ‘외국어로서의 영어’ 상황에서는 한국인은 결코 영어사용권 나라 국민처럼 될 수는 없다. 서울 난곡중 정사열 교사는 “사회적 요구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면 영어가 모국어로 될 때까지 학교에 대한 타박은 계속될 것”이라며 “우리의 말글살이 상황을 전제한 상태에서 학교 영어교육의 공과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면 중등 영어교육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비록 입시라는 제약조건으로 글말에 치중하지만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상위권 학생들은 대학 공부나 1~2년의 영어 연수로 일정 수준 이상의 의사소통 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 통상 등 전문인력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체적인 차원에서 영어사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간과 투자’의 문제가 풀려야 한다. 이것이 외국어 학습의 성패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 및 군사 전문 외국어교육기관인 에프에스아이(포린 서비스 인스더튜트)는 미국인이 일본어나 중국어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이들 말을 익히는 데는 최소 4500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매일 6시간씩 2년 넘게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시간이다. 우리나라 대학 영문과 졸업생도 공부시간을 합쳐야 2500시간정도밖에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도 매일 몇 시간씩 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시킨다면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질적으로 비약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경희대 박병수 교수(영문과)는 “이렇게 영어공부를 하자는 것은 다른 공부를 하지 말라는 얘기”라며 “애초 학교 교육만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사회가 학교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70%의 아이들은 들러리?
중·고교 영어 시간에 많은 아이들이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기초가 중요한 과목인 영어 교육과정을 쫓아오지 못하고 ‘탈락’한 아이들이다. 많은 학부모들은 자신의 이런 경험 탓에 자녀가 탈락하지 않도록 어릴 적부터 영어공부를 채근한다.
그런데 영어를 포기한 아이들이 70% 이상이라면 이는 분명 따져봐야 할 문제다. 수십년 동안 계속돼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지만, 이런 학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과연 불가피한 것일까. 국민의 대부분이 중등교육을 받는 현실에서 70%가 교육과정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는 교육이 정상일까. 서울 경동고 김지탁 교사는 “아이들이 고교에 진학할 무렵이면 영어는 이미 결판이 난다”며 “70%의 아이들이 3년 동안 나머지 30%를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 있는 현실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70%의 아이들이 영어 수업시간에 쌓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좌절감뿐이다. 이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목표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 일부 현장 교사들의 주장이다. 일정한 노력을 하면 70%의 학생들이 성취할 수 있을 정도로 목표를 낮춰 영어에 자신감을 갖도록 하고, 더 높은 수준의 영어를 원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를 위한 환경과 기회를 선택적으로 제공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수능 수준의 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은 대학 입시 하나만을 위해 아이들을 줄세우기 한 결과다. 김 교사는 “영어가 주요 입시과목인 상황에서 30%만을 위한 교육은 고쳐질 수 없다”며 “목표를 낮추고 대입시험에서 영어를 빼는 대신 ‘자격시험화’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영어교육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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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외국인 만나면 ‘꿀먹은 아이들’ --- 이남수 날짜 2002-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