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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강행, 야만의 시대로 회귀하나
오마이뉴스|기사입력 2008-02-27 22:30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학교 현장에 맨 먼저 불어 닥친 것이 바로 '전국 단위 일제 고사'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반응이지만, 이렇게 빨리 관철될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시험의 취지를 두고 워낙 첨예하게 찬반이 갈리는 탓에 섣불리 가타부타 나서기 어렵지만,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찬성이든, 반대든 둘 중 어느 쪽이든 줄을 서야 할 처지입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한 한 타협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제 고사는 오래 전부터 전국 시도 교육청 차원에서 준비돼 왔고, 정권이 바뀌기만 기다려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못 먹는 감을 찔러나 보듯 가끔씩 필요성을 제기하다 그때마다 시민단체 등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전국 석차를 표기하는 일제 고사를 두고 취지와 당위를 거창하게 내세우지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학생 자신의 실력을 정확하게 가늠해볼 수 있어 학력 신장에 도움된다는 것, 학교 간 실력 차이를 분석하여 행정, 재정적으로 지원할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 교사 간 경쟁 유도로 수업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 등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연일 반복해대고 있습니다.
기실 아이들 자신의 성적은 그들 스스로 이미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교내 성적표에서조차 학급 및 학년별 전체 석차를 적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있으나마나한 규정이 된 지 오래입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정보력은 이미 학교 울타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주변 지역의 학교에 서열을 매겨,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조차 일류와 삼류로 불러가며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를 구분 짓기까지 합니다. 하긴 작년 언젠가는 한 지방 신문에서조차 연도별 서울대 진학생 수를 기준으로 지역 명문고가 바뀌고 있다며 대문짝만하게 기사화된 적도 있으니, 조금도 새롭거나 놀라울 건 없습니다.
아이들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해서, 또 경쟁심이 부족해서 학력이 뒤떨어진 것이라는 생각만큼이나, 학교 간 실력 차이를 드러내 보이게 되면 교사들이 분발하게 되고, 덩달아 아이들도 열심히 할 거라는 인식도 어불성설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경쟁만 시키면 나아질 거라는 발상은 무식하거나 순진한 것일 뿐
이미 학교간 실력 차이는 이미 학교 현장의 헌신과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시험 성적이라는 결과만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차이라면 극복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제력과 학력이 정확하게 비례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예컨대, 서울 강남의 아이들과 (경기도 일산의 아이들을 비교는 할 수 있을지언정) 전남의 어느 시골 마을 아이들과 성적으로 줄세우려는 건 차라리 코미디입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출발선을 갖게 만들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고, 무조건 경쟁만 시키면 나아질 거라는 발상은 무식하거나 순진한 것일 뿐입니다.
일제 고사를 보지 않아도, 굳이 그 석차를 내고 평균을 산출하지 않아도, 어느 지역 어느 학교가 지원이 절실한지 삼척동자도 이미 다 압니다. 공교육이 질이 낮아지고 있다고 온 나라에 한숨 소리 가득하지만, 이미 농촌의 수많은 학교는 문을 닫은 지 오랩니다. 아예 공교육 시설 자체가 없는 셈입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느 학교의 성적이 우수하고, 부족한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근거가 없다는 건 일제 고사 강행을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합니다. 결국 거창한 취지 중 그나마 수긍이 가는 건 학교간 성적을 비교함으로써 교사의 수업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거름종이’ 삼아 교사의 전반적인 자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것뿐입니다.
여기서도 ‘80년대로의 회귀’라는 역한 냄새가 납니다. 20여 년 전 고등학교에 다닐 적, 전국 단위의 모의고사 성적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한 반에 몇 명씩은 아예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결과 중심의 교육 풍토가 만든 일선 학교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였던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학급간 성적 비교를 통해 담임교사의 자질을 판단하려는 분위기 속에 학급 내에서도 시험 날이면 꼴찌 아이들을 등교조차 시키지 않던 것도 기억합니다. 하긴 당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학급에서 서울대에 진학시키는 수만큼 담임교사에게 별도의 수당이 지급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가 따로 없었던 셈입니다.
이미 곳곳에서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든, 교사든 자발성이 배제된 네거티브한 방식으로는 교육적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공공성을 상실한 채 아이들, 학부모 모두가 예외 없이 무한 경쟁과 이기적인 마인드로 무장되어 가는 우리네 교육 현실에서, 단언컨대 일제 고사의 폐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곳곳에서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학교 앞 서점에는 이미 반배치고사용, 전국 단위 진단평가용 참고서와 문제집이 쏟아져 나오고, 학원마다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거나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며 수강을 독촉하는 홍보물이 여기저기에 나풀거리고 있습니다.
아예 대놓고 ‘불안한’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일제 고사 및 선행학습 관련 설명회를 갖는 학원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으며, 듣자니까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일선 학교에 일제 고사 대비용 예상 문제집도 앞장서서 배포하고 있다니 그저 황당할 지경입니다.
우연히 어느 중학교의 2008 연간 학사일정을 보니, 굵직한 시험만 일곱 차례입니다. 신입생의 반배치고사를 시작으로, 3월의 전국 단위 진단고사, 5월, 7월, 10월, 12월의 중간, 기말 고사, 12월 초순의 학업성취도 평가 등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 굵직한 시험 외에도 매월 한 차례씩 학년별로 영어듣기평가와 퀴즈나 시험 형식으로 행해지는 몇몇 과목의 수행평가까지 더해질라치면 ‘1년 내내 시험’이라는 아이들 말이 엄살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시험을 빼더라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3~4일간 치러지는 것을 감안하면, 200일 남짓한 수업 일수에서 대략 열흘에 한 번꼴로 크고 작은 시험을 치르게 되는 셈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호환마마가 아니라 시험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호환마마가 아니라 시험이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시험에 공부 내용이 철저하게 종속돼버린 교육 현실을 무시한 채 아이들에게는 ‘공포’를, 학부모들에게는 ‘불안감’을 조장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학력 신장 방안’은 그만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공부를 즐겁다고 말하는 아이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시험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공부가 즐거울 리 만무하지만,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며 자정이 넘도록 학원과 독서실을 헤매다니는 것이 우리 사회 대다수 아이들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비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다간 ‘학생’이라는 보통명사가 ‘학습노동자’로 대체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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