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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287호 광복 70주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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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16-08-09 15:32 조회1,0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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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옥 할머니의 증언 현재 88세, 서울 ‘평화의 우리집’ 거주

열세 살 때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공장에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믿고 따라간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간 곳은 하얼빈의 ‘위안소’였습니다. 사람이라곤 군인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방에 갇혀서 듣는 말이라곤 “소리 지르면 죽여 버린다!”, “죽고 싶으냐?” 뿐이었습니다. 열세 살이었으니까 당연히 울기도 했죠. 그럴 때면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아파서 더 울면 발로 차거나 더 심하게 맞았습니다. 어린아이라도 가차 없이 난폭하게 취급되어 밥도 못 먹을 때도 있었지만, 누구도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이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생리가 있을 때도 상관없이 군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불이 새빨개져도 군인은 자신의 욕망을 다 채우지 않으면 나가지 않습니다. 몸을 씻거나 닦을 수조차 없이 계속 상대해야 했습니다. 머리에는 칼로 베인 상처도 있고 자궁도 다쳐서 아이도 낳을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모두 말하려 해도 이젠 더 이상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 현재 88세, 대구 거주

나는 1944년 연행되어 기차에 태워졌습니다. 대구에서 경주, 평양, 안주, 대련으로 이동한 후 일본 군인이 많이 탄 커다란 배에 태워졌습니다. 배 위에서 일본 군인에게 당하고, 도착한 곳이 대만의 ‘위안소’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아무리 저항해도, 아무리 거역해도 일본 군인을 거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봄, 16살 때 위안소가 폭격을 맞아 건물 더미에 깔려 맨손으로 흙을 긁어내고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를 귀여워해 주던 언니 두 명은 건물 더미에 깔려 죽었습니다.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누군가에게서 그 일이 알려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생활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 현재 90세, 서울 ‘평화의 우리집’ 거주
열다섯 살 때 우리 동네의 구장과 반장이 일본사람과 함께 우리 집에 오더니 어머니에게 “데이신타이에 딸을 보내야 하니 내놓으시오. 아들이 없으니 딸이라도 나라를 위해 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하지 않으면 아주머니는 반역자가 되어 여기서 살지 못하오.”라고 해서 데이신타이가 뭐냐고 물으니 “군복 만드는 공장이오. 3년만 일하면 되고 그전에라도 시집가게 되었다고 연락하면 보내주니 안심하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만을 거쳐 광둥에 도착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나는 공장에 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군의관이 우리를 검사했고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질 ‘위안소’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방에서 쉬고 있는데 우리를 검사한 군의관이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도망쳐 덤불 속에 숨었습니다. 군의관은 나를 쫓아 와서 내 양 볼을 엄청난 힘으로 때렸습니다. 한참을 맞고 나니 얼굴 전체가 감각이 없었습니다. 각 방에는 번호가 붙어있었고 우리는 감시당했습니다. 하루에 15명 정도 상대해야 했고 주말에는 말할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50명은 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홍콩으로 끌려갔습니다. 군인들이 하도 많이 들이닥쳐서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싱가포르,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자바로 우리는 계속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47년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시집가라고 성화셨습니다. 할 수 없이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말하니 어머니는 통곡하셨으며 그때 심장병이 생기셔서 내내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정신대 신고를 하라는 얘기를 보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전화했습니다. 그 후 열심히 일본군의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당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모든 국민이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증언한 ‘그 일’은 우리 역사가 오랫동안 침묵하
고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가정과 국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50년 동안 홀로 순결하지 못한 여자라는 손가락질과 가난을 운명처럼 감수해야만 했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말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에 의해 제기됐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당사자들의 증언으로 새로운 전환을 이루었다. 1990년 11월 발족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중심으로 지루한 투쟁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진상 규명과 일본의 사죄와 배상은 그간 정대협을 중심으로 9개국 검사단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동남아 군 위안부 피해여성 공동투쟁등 국내외적인 투쟁 속에서도 여전히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 정부의 오리발 속에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발족한 정대협은 고령의 생존자들을 돕기 위한 의료지원, 상담, 인권캠프, 치유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특별히 재가자원봉사자를 모집하여 교육하고, 자원봉사자와 할머니 1:1 자매결연을 통해 홀로 지내는 피해자들의 벗이 되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혼자 지내기 힘든 분들을 위해 쉼터 ‘평화의 우리집’을 마련하였다.
정대협과 피해자들은 한국정부원에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도록 촉구하여 1992년 1월 24일 외무부 내에 ‘정신대 실무대책반’을 만들어 정부 각처가 문서자료를 조사하고 내무부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정신대피해자 신고’를 접수받았다. 대부분 생존자들이 경제 상황이 어려웠으므로 생활안정지원법(1993년) 제정을 촉구하여 임대아파트(11~18평)를 제공하고 일본 전범의 출입국금지법안(1997년)을 통과시키는 데 적극 노력하였다. 특히 1998년 5월, 법적 배상을 회피하기 쉬운 수단으로 일본 정부가 민간차원의 위로금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Asian Women's Fund)을 지급하려는데 대응하여민간차원에서 범국민 모금을 두 차례(1997,1998년)에 걸쳐 실시하여 위로금을 지급하고, 동시에 한국 정부로 하여금 정대협 모금액에 정부 예산을 추가하여 4,300만 원의 생활안
정 지원금을 지급도록 활동하여 성과를 이루었다. 이 외에도 한국 정부가 대일외교 및 국제 기구 활동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사죄와배상을 요구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정대협은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상정한 이래 전시 중 여성인권유린의 문제로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를 확산시켜 왔다. 두 차례에 걸친 유엔 특별보고관의 조사 활동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법 위반 행위임을 확인하고 이에 따른 일본 정부의 책임 이행을 권고하는 보고서 채택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현재까지 유엔 인권이사회,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국제법률가협회, 국제노동기구(ILO) 전문가위원회 등 국제기구의 권고가 잇따랐다.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와 1995년 북경 세계여성대회에서도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결의문에 포함시키는 등 국제이슈로 만들어 냈고, 1992년부터 아시아연대회의(Asian Solidarity Conference)를 통해 아시아 피해국들과 공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0년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은 세계 여성과 시민들의 연대 속에서 일본군 성노예제도에 대한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묻고,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 책임을 묻기 위한 상징적인 국제인권법정으로 최종판결을 통해 히로히토 등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책임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이후 각국의회와 일본, 한국 등 지방의회에서도 결의안 채택이 이어지고 있다.


수요시위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되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이행 등 문제해결 그리고 이를 통한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요구하며 수요시위는 시작되었다. 그 첫걸음 이후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인권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할머니들이 외쳐왔으며 2011년 12월 14일 1,000차 수요시위를 기록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5년 7월 현재 1,187차를 진행했다. 우리는 줄기차게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전범자처벌, 역사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의 7가지 사항을 일본 정부에게 요구하고 있다.
정대협 회원단체와 수많은 시민사회 단체들이 주관하는 수요시위는 어린이, 청소년, 일반인 등 국내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인권과 평화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이 되고 있다. 광복절과 세계여성의 날 등 특별한 기념일에는 세계연대집회로 진행되어 각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치고 있다. 

평화비 건립
2011년 12월 14일 1,000차 수요시위를 맞이하여 이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는 이러한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할머니들의 외침에 뜻을 이어받아 12시 정각 정의와 평화가 외쳐졌던 일본대사관 앞 그 자리에 ‘평화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인류역사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자행되는 전시 여성 폭력이 중단되기를 바라며 인권과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와 평화비를 세우려는 노력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고 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공간이다.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며 전쟁과 여성 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행동하는 박물관이다. 2004년 정대협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위원회’를 정식 발족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미래 세대에게 물려 줄 인권과 평화를 위한 박물관 건립을 위해 희망찬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마침내 2012년 5월 5일 어린이날,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미래 세대와 시민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어 활짝 문을 열었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공부방을 만들어 주고 싶다던 할머니들의 꿈, 나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할머니들의 바람, 그리고 약 9년여 동안 박물관 건립을 위해 모금에 참여하고 뜻을 모아준 수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세워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여성 폭력과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비기금
전쟁의 한가운데서 무자비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온 세상에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며 평화와 여성인권을 외치는 당당한 언니가 되었다. 지난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전액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해 기부하겠다는 특별한 기자회견이 가졌다. 이러한 할머니들의 숭고한 뜻을 따라 전시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아나가고자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나비기금이다.
나비기금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두 할머니의 희망을 안고 나비는 2012년 아프리카 콩고 민주공화국 강간 피해자이면서 강간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레베카 마시카 카츄바에게, 2013년부터는 베트남 전쟁 시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에게 날아가 희망을 전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때로부터 70년, 일본이 패망한 때로부터 70년이 되는 해이며 곧바로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침략과 약탈로 불행과 고통을 안겨온 일본은 잘못된 과거를 사죄하고 법적 배상해야 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곧 인간의 존엄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공유하는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역사의 산 증인인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은 대부분 80~90대에 이르는 고령으로, 현재 한국 정부에 등록된 238명 할머니 중 2015년 7월 현재 48분 만이 생존해 있다.

“매년 더 많은 수의 ‘위안부’ 생존자들과 다른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고통과 이야기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위를 계속해 나가며 일본 정부가 들을 때까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그리고 다음 세대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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