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생이 상담을 요청하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학생이 교사에게 진로에 대한 정보를 묻거나 공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거나 조언을 요청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학생 개인이 겪고 있는 삶의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 다가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학생의 이야기를 힘껏 경청하고 감정에 공감하며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 보다 교사 자신의 판단 기준에 근거하여 문제 해결 방법을 제안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꾸짖거나 질책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조용히 다가와 주변을 의식하며 신중하게 상담을 요청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들의 고민은 친구들이 해결하기 어렵거나 도움을 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망설임 끝에 그래도 믿을 수 있으며 자기의 편에 서 줄 것 같은 교사들을 찾아서 다가온다. 평상시의 친분보다 교사가 갖고 있는 생각, 가치관 등이 판단 기준이 된다. 보호자들은 청소년 자녀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자녀들과 일상적 소통은 쉽지 않다. 답답하다. 10대의 자녀들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그들은 보호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는지, 혼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고민에 공감하고 옆에 서 있어 줄지 등을 평상시 보호자들의 언행 속에서 판단한다. 자녀와의 소통에서 핵심은 친함 보다는 신뢰이다.

항상 잘 들어줄 것, 충고나 조언을 하고 싶을 때는 잠깐 멈추고 자녀들에게 먼저 해도 되겠는지 묻는 것이 필요하다. 원치 않는 충고와 조언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

학생이 조심스럽게 상담을 먼저 요청할 때는 거의 대부분 비청소년 성인의 도움이 필요한 사안이다. 이런 상황이 오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예감이 안 좋다. 고민 해결에 힘이 되어 주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많은 경우 ‘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임신’이 고민의 핵심이면 참으로 난감하다. 할 수 있는 말과 도울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방과 후 조용한 장소에서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낯빛에는 근심이 가득 찼고 평상시와 다른 태도에 내 심장은 쿵 떨어졌다. 어떤 고민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성과 관련된 문제겠다는 느낌이 왔다.

다음 날 학생과의 만남 전까지 고민이 많았다. 임신에 관한 상담 요청이면 어떻게 하지?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사자들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사실이라면 보호자에게는 어떻게 알릴까? 보호자가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임신 중지(낙태)를 원한다면 그 땐 어떻게 하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문 기관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고 홈페이지도 찾아본다. 출산을 하겠다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하지?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며 학생의 불안과 공포, 고통에 우선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심호흡을 하고 학생을 만났다. 역시 ‘임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학생은 애인이 임신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임하지 않고 섹스를 했고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짠했다. 임신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고 두렵겠지만 회피하지 않는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에 함께 풀어야 하며 애인의 고통과 고민, 두려움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만일 임신이 맞다면 두렵겠지만 보호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점도 이야기 했다. 왜냐면 보호자야말로 너희들의 편에 서서 너희들을 도울 수 있는 분들이라는 말도 건넸다. 착잡했다.

며칠 후 다행히도 임신이 아니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음을 세게 누르고 있던 돌이 사라졌다. 혹시 모르니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의 연락처를 주었다.

임신한 학생의 학습권 보장이 학생인권규정 등에 포함되어 있으나 현실에서 임신은 여학생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위기 상황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임신한 학생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눈초리들을 견뎌내는 것도 어렵지만 학교라는 공동체는 과연 임신한 학생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문제 학생, 다른 학생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학생으로 규정되며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학생인권규정은 임신한 학생에 대한 구체적 보호, 지원 대책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아직은 상징적 선언 수준이다. 따라서 관련 대책이 촘촘하게 마련되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의 임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2. 서로 좋아해서 섹스를 했으나 피임은 하지 않았다.

“임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서는 안된다. 앞으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개입이 필요하다. 학생은 애인과 서로 좋아하고 원해서 섹스를 했다고 했다.

먼저 제안한 것은 누구이며 상대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었는지를 다시 물었다. 제안은 남학생이 했고 애인은 거부하지 않았다고 했다. 거절하지 않음이 동의로 이해되는 것이 문제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안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은 욕망은 청소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한 감정이 잘못된 것도 아니며 문제인 것도 아니다. 다만 성적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래서 학교 성교육에서는 책임을 강조한다. 섹스는 임신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외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청소년의 임신은 지지받지 못하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청소년의 임신은 그 자체로 학생에게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학교 성교육은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청소년의 섹스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청소년 시기에 성적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전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임을 가르치기는 하나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청소년이 섹스를 처음 경험하는 나이대가 점점 내려가고 있는 현실에서 섹스의 위험을 강조하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적극적인 피임 교육이 필요하다. 피임의 원리와 피임도구의 종류, 사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은 피임법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학교 성교육에서는 콘돔, 피임약 등을 알려준다. 실제로 성교육을 적극적으로 하는 학교에서는 콘돔 사용법을 교육하기도 한다. 학교 성교육이 콘돔의 존재와 중요성을 알려줘도 성인(비청소년)이 되고 나서 콘돔을 사용하는 비율을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이유가 무엇일까? 콘돔을 구매하기 어려워서는 아니다. 마트, 공중 화장실의 자판기에서 콘돔은 쉽게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콘돔 사용률이 낮은 것은 인식 부족 탓이다.

3. 성적 행동에 따른 책임감만큼 성적 평등이 중요하다.

연애에도 성별, 나이 등의 권력이 작용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권력 위계가 있다.

우선 사람을 여자와 남자로 나누고 성별에 따라 감정과 행동의 특성을 부여하고 여자는 감성적, 남자는 이성적이라는 오래된 성별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성적 특성의 남녀의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는 순간 여자아이를 둔 보호자는 피해자가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남자아이를 둔 보호자는 혹시나 가해자가 되지 않을까 큰 걱정을 한다.

애인보다 나이가 어려도, 여성이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확신하고 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한국 학생들은 머리로는 동의 없는 성적 접촉이 폭력임을 알고 있으나 실제로 ‘동의’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에게 정말 가르쳐야 할 성지식은 동의라는 것이 무엇인지이다. 또한 상대의 의사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하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나 남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말하거나 상대에게 성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주체들이다.

나이가 어린 이들이나 여성인 경우에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개별적인 연애 관계에서 권력이 역전될 수는 있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 욕망을 드러내거나 상대에게 성적 행위

를 제안할 경우 ‘밝히는, 까진, 좀 이상한, 성 경험이 많은’ 존재로 인식된다. 또한 상대의 성적 접촉을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학교 성교육에서 피임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현실의 성별 권력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성적 행위의 제안자는 남성, 여성은 소극적인 동의, 혹은 의사 표현 없음이 동의로 이해되는 현실은 반복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콘돔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남성이 거부할 경우 콘돔 없는 섹스는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학교 성교육은 기능적 측면에서 피임법을 교육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적 권력 관계를 가르쳐야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성과 여성의 성이 어떻게 다르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성적 주체이며 상대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는 관계 맺기의 방식이 무엇인지가 성교육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의 학교 성교육은 주로 보건과 건강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성적 관계 맺기에 대한 교육은 페미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학교 성교육의 페미니즘적 전환이 필요하다.

성적 행위는 적극적인 동의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콘돔 없는 섹스는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섹스 전에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져 하며 섹스로 인한 임신, 질병 등의 위험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여학생들이 이러한 요구들을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을 기반으로 가치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말하기 어려워서, 거절하면 상대가 싫어할까봐, 분위기를 깰가봐 등 다양한 이유로 여성들은 원하지 않은 성적 접촉에 노출된다. 남성의 경우 성적 행위의 상대로서 여성들의 의사를 묻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강력한 거부가 없으면 동의라고 생각하며 섹스를 한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도 섹스가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애써 콘돔을 사용해야 할 필요도 잘 느끼지 못한다. 책임감만큼 성적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평등한 관계 맺기이다.

4.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자녀가 십대가 되면 보호자들의 불안감은 커진다. 키스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섹스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보호자, 특히 여자아이를 둔 보호자의 마음이다. 여성 보호자들은 임신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적이 대부분이라 섹스-임신의 연상은 지극히 당연하다. 남편, 애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던 기억들, 적극적 동의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섹스 경험들. 콘돔 없는 섹스를 거부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보호자들에게도 있다. 그래서 아예 자녀가 연애만 하기를 바란다. 예쁘게 연애는 하더라도 섹스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학생 자녀를 둔 보호자의 고민도 매우 크다. 혹시나 잘 몰라서 혹은 장난이나 놀이로 생각하며 다른 이에게 성희롱을 하거나 성폭력 가해자가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 불안하기도 하다. 혼란의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다. 최근 보호자들은 자비를 들여서 자녀들에게 학교 밖 교육기관에서 성교육을 받게 한다는 뉴스도 들린다.

학교 성교육이 이런 고민과 불안을 해소해 주길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불만과 불신의 목소리가 크다. 형식적인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2015년 만들어진 국가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대한 문제 제기도 꾸준히 있다.

성교육을 고민하는 단체들은 국제 인권 수준에 맞는 학교 성교육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육부는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성적 보수주의 엄숙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성’은 인간의 삶 자체이다. 성은 연애, 사랑, 가족, 건강과 연결되어 있고 관계, 공동체와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취향, 감성, 경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국어와 수학을 공부하고 민주시민되기를 배우는 것 이상으로 제대로 잘 배워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학교 성교육의 큰 흐름을 다시 만드는 중요한 시기이다. 청소년, 교사, 보호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함께 포괄적인 성교육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가야 할 때이다. 우리 사회의 성평등의 진전을 위해!

김성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