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파란만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인생이다. 아름다운 청춘으로 흔적이 새겨진 20대엔 공부도 연애도 마다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화와 여성운동에 발을 담그는 게 출세를 위해 영어책이나 줄창 파먹는 것보다 나름 고상하고 값지다고 여겼다. 도서관보다는 최루탄 냄새가 자욱한 길거리를 돌아다녔으며 소설가가 되고 싶은 야무진 꿈은 먼 훗날을 위해 가슴에만 꼭꼭 쟁여두었지만 불합리한 세상에 저항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바야흐로 내 세상이었다.

노동운동하다 시인이 된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가정에 묻혀 소시민으로 살았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예의 그 타고난 반골기질이 다시 발동하여 학교 교육의 문제점이 내 깐깐한 촉수에 걸려들면서 갈 길은 ‘참교육’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죽이 맞는 엄마들이 모여 일 년 간에 걸친 꼼꼼한 준비를 한 후 ‘참교육학부모회 구미지회’를 만들었는데 보수꼴통 구미에서 진보적인 학부모 단체가 발족됐다는 사실만으로 지역 뉴스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토론하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을 학습과 공부로 채워가며 제법 그럴싸한 회지도 만들어 참학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했던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열정적인 학부모의 모습이었다.

잘해보겠다는 욕심이 과한 탓인지 생각이 다른 회원들을 품어주고 토닥여주지 못하면서 삐걱거림이 연출됐는가 하면 진보정치에 곁눈질을 하면서 개인적으론 참학 활동에 소홀히 한 측면도 없지 않았고 긴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세월호 참사로 나라 전체가 극심한 고통과 슬픔에 빠지면서 다시 참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분향소를 열기도 하고 세월호 진상규명운동과 매주 지역에서 열렸던 촛불시위에 함께 하면서 구미참학도 다시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개인적으로 여러 운동단체에 기웃거리고 연대했지만 누가 뭐래도 내 정체성은 참학인이고,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구미참학’이라는 닉네임이 자랑스러웠다.

어느새 아이도 훌쩍 커버리고 지회장 자리도 내려놓은 다음부턴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슬슬 고민이 들었다. 멋들어지게 살다 죽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저항하는 삶과 글쓰기였다. 기차 타고 간 서울 광화문 촛불 시위와 대구 평화시민집회, 혹은 지역의 사드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저항정신을 단련시켰다. 성주 소성리에 배치한 사드를 뽑아내고 이 땅의 평화와 자주를 실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며 마음을 보태는 일이 요즘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실천 활동이다. 명품가방에 목숨 거는 중년의 여성이 아닌 내가 은근 대견하다. 인간답게 늙어가고 밥값을 하며 살고 있다는 자족감이랄까.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천만시대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에 연대하기도 하고 삼성을 비롯한 독점재벌 해체 등 헬조선 변혁운동에도 동참하면서 양비론, 양시론이 아닌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을 위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개인인 내 모습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지만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저항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길 때는 크고 단단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 모든 운동이 ‘참학인’이라는 자부심과 참교육 운동을 하면서 쌓인 통찰력과 내공이 있기에 가능했다. 오늘도 나는 거리로 나간다.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에 걸림돌이 될 불합리한 구조와 평화를 위협하는 환경을 바꾸는 게 참교육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보기 때문에 씩씩하게 질주한다.

은영지 (구미지회 전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