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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제도 유지확대 보완방안 _20040815(200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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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사무처 작성일15-12-22 10:23 조회1,2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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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이 파일은 첨부가 안 되어 아래에 글 전문을 올립니다.
표가 깨져 죄송합니다.

아래 글은 2002년 작성하여 2003년 초에 일부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따라서 2003년, 2004년의 여러 연구결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쟁점과 문제의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올렸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역별로 문제의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해지역, 강원 지역 등 비평준화 지역은 평준화제도 자체 도입이 중요 과제일 것이고, 평준화지역에서는 평준화 존폐, 보완 논쟁이 진행 중입니다.

개인적 입장은 긍정적인 부분이 더욱 많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평준화제도를 확대시키되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검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안선회




고교 평준화와 자립형 사립고 제도에 대한 고찰
안선회

Ⅰ. 들어가는 말

평준화 제도는 극심한 고등학교 과열 입시 경쟁, 그로 인한 사교육비 증가, 중학교 교육의 파행적 운영, 일류고등학교 학벌 경쟁으로 인한 부작용, 인구의 도시 집중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없이 많은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어느 정도의 긍정적 효과가 인정되기에 아직까지 그 기본 골격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익산시(구이리), 군산시는 평준화 제도의 도입, 이후 해제, 다시 재도입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2002년에는 경기도의 일산, 분당, 안양・과천・의왕・군포 지역에서 평준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평준화로의 회귀는 최근 개편된 대학입시에서 내신 성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평준화 제도가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지역주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3월 현재 평준화 제도는 전국 12개 사도의 23개 지역에서 적용되고 있다. 학교수로 보면 제도 적용을 받는 학교는 전체 일반계 고등학교의 57% 정도가 되며, 학생수로는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의 74% 정도가 된다(박남기, 2002).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특히 2002년에는 평준화 제도에 대한 많은 비판에 직면하여 교육계의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다. 심지어 평준화 제도에 대한 헌법 소원까지 제기되어 있어 평준화 제도의 운명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달려 있다. 더욱이 최근 교육부가 2004년부터 고교평준화제도 실시 여부를 시도교육감이 최종 결정토록 한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주택정책의 일환으로 자립형사립고까지 확대 설립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그런데 평준화 제도에 대한 언론이나 학계의 논쟁은 아쉽게도 상대 주장에 대한 몰이해나 왜곡, 심지어 비판 아닌 비난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평준화 제도에 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유지 또는 반대라는 두 입장으로 양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주장을 왜곡시켜 비난하거나,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까지 엿보인다.
평준화 제도에 관한 대표적인 입장을 몇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평준화 제도의 유지 또는 변화 요구의 정도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1) 공립은 평준화 유지, 원하는 모든 사학의 평준화 해제,
공립은 자율학교에 선발권 부여
2) 공립은 평준화 유지, 자립형 사학 확대, 공립은 자율학교에 선발권 부여
3) 공사립을 막론하고 특성화 고교를 포함한 자율학교 설립 확대
4) 현재 상태로 유지, 자립형 사립학교는 물론 자율학교도 반대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무시하고 평준화 찬성 또는 반대로만 논의를 단순화하는 것은 논쟁을 위한 논쟁이며, 생산적인 학문적 논쟁이 아닌 단순한 이념논쟁이거나 선동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지양하기 위해 지금까지 평준화 제도에 대해 제기되어 온 여러 쟁점을 면밀히 검토하여 단순한 찬성, 반대가 아니라 좀더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가시적으로 드러난 몇 개의 쟁점과, 그 근저에 있는 이념적 쟁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핵심 쟁점이 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에 대한 논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뒤에 기존 평준화제도에 대한 종합적인 개선 방향을 찾고자 한다.

Ⅱ. 평준화 관련 가시적 쟁점의 검토

1. 학력 저하 여부

평준화 반대론자들은 평준화 때문에 학력이 ‘하향평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학교와 학급이 학력에서 이질적인 학생들로 구성된 상황에서 교육은 특히 우수한 학생들에게 무의미해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한다. 평균적인 수준을 전제로 한 교육 내용이나 방식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이나 흥미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소위 일류학교에 비교하면 학생간의 경쟁이 적어 학습이나 성취를 중시하는 이른바 학업문화가 위축되고 성취동기도 전반적으로 낮아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준화 상황에서 학교 교육은 우수 학생들의 수월 가능성을 구속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하향 평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찬성론자들은 실증적인 증거를 통해 이를 반박한다. 1979년 한국교육개발원의 한 연구보고서(김윤태 외, 1979)에서 학력저하(“하향평준화”)의 실증적 근거는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에서 행한 실증적 연구(김영철, 1995)에 의하면 평준화 지역과 비평준화 지역간의 의미 있는 학력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최근의 강태중, 성기선의 연구에서도 평준화에 따른 성적의 하향평준화는 사실과 다르다고 확인되었다(강태중, 성기선, 2001). 찬성론자들은 이러한 실증적인 증거를 통해 평준화 유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강태중, 성기선(2001)이 경기도 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평준화 고등학교와 비평준화 고등학교의 1학년 당시의 학업성취도 수준과 동일 학생들이 3학년이 되었을 때의 성취도 실태 및 성취도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았을 때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강태중, 성기선, 2001).
첫째, 평준화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 수준은 1, 3학년 공히 비평준화 고등학교보다 높은 편이다. 1학년의 경우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가 약 13점 높으며 동일 학생의 3학년 성취도 수준은 약 15점 정도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보다 높다.
둘째, 고등학교 1학년 때의 학업성취도변인의 영향력을 통제했을 경우, 3학년 때의 학업성취도 수준의 경우, 여전히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들이 높은 편이었다.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에 다닐 경우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다닐 경우보다 3학년 성적이 평균적으로 15.75점 높아진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변수(이를테면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개인의 능력과 노력 변수)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어서 다소 과장된 경향이 없지 않다.
셋째, 고등학교 입학 당시의 학생들의 성적집단별로 구분하여 분석해 본 결과, 평준화 고등학교의 경우 비평준화 고등학교와 비교할 때, 최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다소 떨어졌으며 중하위권 학생들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많이 상승하였다. 즉 평준화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고등학교와 비교해 볼 때 아래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적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다소 불리한 측면이 있는 반면, 중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매우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표1> 성적집단별 학업성취도 변화 정도 : 평준화・비평준화 고등학교
구 분
평준화 고등학교(A)
비평준화 고등학교(B)
차이(A-B)
① 上: 평균값+2 표준편차
② 中上:평균값+1 표준편차
③ 中: 평균값
④ 中下:평균값-1 표준편차
⑤ 下: 평균값-2 표준편차
351.85
303.33
254.82
206.31
157.80
354.63
302.67
250.70
198.73
146.77
-2.78
0.66
4.12
7.58
11.03


그러나 이 연구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 자신들의 지적대로 비평준화 고등학교의 경우 대부분 중소 도시 이하에 분포하고 있는 반면에 평준화 고등학교의 경우 대도시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격차 속에는 평준화 정책의 적용 여부에 따른 차이와 함께 도농(都農) 지역 간의 학업성취도 격차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강태중, 성기선, 2001). 따라서 이 차이는 다소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연구에 대한 후속연구의 성격으로 수행된 성기선(2002)의 연구에서는 상위권학생들의 성적이 평준화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결과는 분석자료의 영역을 전국단위로 확대했을 경우 사실과 다르다고 밝힌다. 다만, 도시화의 정도를 통제한 후의 평준화 효과는 최상위층인 상위 5% 집단은 두 지역간에 차이가 없으며, 상위 5-20% 집단의 경우에는 비평준화지역이 평준화지역보다 평균 2점 정도 높으며, 상위 29% 이하 집단에서는 대체로 평준화가 비평준화지역보다 성적향상 정도가 높은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성기선, 2002b).
이러한 연구 결과를 인정한다고 해도 평준화 제도 그 자체는 유지되면서 어느 정도의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 중등교육에서 평등성과 수월성(equity and excellence)을 동시에 제고하기 위해서는, 평준화 정책을 적용하면서 동시에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서 보완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강태중, 성기선, 2001). 다시 말하면 이러한 연구 결과는 평준화를 전면적으로 해제하고 선발시험을 부활하자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론의 논거가 될 수 있지만, 평준화 개선책마저 부정할 수 있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더욱이, 성적에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학생의 소질과 특성, 희망에 맞는 교육을 추구하는 특성화고교를 포함한 자율학교를 확대하자는 개선책까지 비판하는 논거가 되기는 어렵다.
덧붙인다면, 평준화제도 개선 필요성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동일 지역인 서울 내의 평준화 고등학교와 예외적 적용을 받는 비평준화 고등학교, 즉 특목고(과학고, 외국어고) 재학생들의 1학년 당시의 학업성취도 수준과 동일 학생들이 3학년이 되었을 때의 성취도 실태 및 성취도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연구의 결과가 평준화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제도적 개선 방안이 필요한지 여부를 어느 정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2. 사교육비 증가와 재정의 압박

평준화 정책은 고입과외의 과열을 막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추진되었다. 정책 입안 당시, 평준화 정책은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과외 수요를 격감시킬 수 있을 것이므로 사교육비 지출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었다. 그러나 평준화 반대론자들은 이러한 기대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평준화 정책이 학교 선택을 제약하고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게 된 결과는 학생과 학부모로 하여금 학교 밖에서 효과적인 교육 기회를 찾도록 내모는 사태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평준화 정책이 고등학교 입시의 경쟁력를 약화시켜 중학교 단계에서 과외비용을 줄일 수 있었던 성과에 비하여, 고등학교 교육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족을 키워 그들로 하여금 사교육 시장을 찾아 과외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몰아간 부작용이 더 크다는 분석이다(강태중, 2002). 학생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듣기 위해 사설학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평준화가 애초 취지와는 달리 사교육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주간조선, 1693호, 2002. 3. 7).
그러나 평준화가 사교육비를 증가시켰다는 주장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다. 예컨대, 이주호(2002)는 이주호・홍성창의 2001년 경제학연구에 실린 논문에서 서울시의 지역간에 명문 대학 진학률이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으며, 이 격차의 주요 원인은 과외비 지출의 차이에 있음을 실증적 데이터 분석을 통하여 보였다고 주장한다. 즉, 평준화 제도는 부유층이 고액과외를 통하여 자녀를 명문 대학에 진학시키는 통로를 차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기 때문에 교육의 형평성을 악화시키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준화의 대폭 수술을 통하여 장기적으로 과외를 줄이게 되면, 교육의 효율성은 물론 형평성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선 평준화 상태에서의 과외비 증가를 비평준화 상태와 비교하여 주장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변인이 통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준화가 주요 원인이라는 결론은 논리적 비약이다. 희망교육연대의 조사(2002년 4월)에서 주목할 것은 과외의 이유로 학교교육부실과 성적 향상 및 입시를 나누어 선택하게 한 결과이다. 성적 향상 및 입시가 79.7%, 학교교육부실이 7.8%로 학교교육부실보다 성적 향상 및 입시라는 과외 이유가 무려 열 배가 넘는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과외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또한 공교육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하지만, 설사 공교육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녀들의 입시를 위한 성적 향상의 필요에서, 그럼으로써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과외를 찾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해 준다. 따라서 이주호의 주장은 현 상태에서 학교에 대한 불만으로 이전보다 사교육비가 줄지 않고 더욱 증가했으며, 지역별 사교육비의 차이가 대입진학률의 차이라는 주장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평준화가 그 원인이고 이를 해제하면 사교육비가 줄어 효율성과 형평성을 함께 높일 것이라는 주장의 논거는 되기 어렵다.
더욱이 현재 과학고와 외국어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과외교습과 사교육비가 오히려 일반고 재학생보다 많은 현상은 경험적으로 확인된다. 자율학습이 끝난 심야에 학원으로 와서 추가 학습을 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이는 내신의 중요성과 더욱 심한 경쟁에서 오는 부담감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자립형 사립학교도 거의 유사한 결과가 빚어질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관해서는 반드시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져 정책 판단의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과외비 문제와 함께 제기되어 온, 평준화 정책이 교육재정을 전반적으로 핍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사실 그러한 영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통해 국민의 교육비 부담이 감소하고, 사학을 포함한 모든 고등학교의 교육 조건의 균등화가 실현되었다는 점, 과열 고교입시 경쟁으로 인한 각종 부작용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준화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기는 부족하다. 오히려 부족하나마 공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사교육비 문제와 교육재정 문제는 어느 한 편의 주장도 평준화를 좌우할 결정적 논거가 되기 어렵다. 학교교육이 내실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과외수요를 없애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재정 운용과 관련하여 사립학교에 갈 예산을 공립학교에 쓸 수 있다는 주장은 바로 지금 교육 재정을 충분히 확대할 의지와 실천이 없는 한,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사학이 충분치 않은 한, 사학의 회계가 투명하지 않는 한, 평준화 제도를 해제시키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교육비와 교육 재정 운영의 문제는 고려할 수는 있겠지만 평준화 제도의 존폐의 논거로서는 타당하지 않다.

3. 학교 선택권

학교선택권을 확대하자는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을 확인한 뒤 두 주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학교 선택권 요구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도 이미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 요구는 확대되어 왔다. 서구 사회에서 학부모의 학교 선택제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는 배경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명분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와 관련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학부모의 기본권이라는 것이다. 둘째, 학부모는 행정당국보다 자신의 자녀에게 적합한 학교를 훨씬 더 잘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학부모가 자녀들의 학교선택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면 자녀들의 학교에 대한 인식이나 동기부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교간 경쟁이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으로서, 이는 서구에서 각국 정부가 학교선택권 강화를 표방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Walford, 1994; 김경근, 재인용, 2001).
학교 선택제와 관련한 노종희, 박정애(1999)의 연구를 보자. 이 연구는 평준화가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율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나 모든 학교를 무개성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고 지적한다.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에 구분 없이 모든 학교가 일률적으로 동일한 교육과정, 교육내용, 비슷한 학교설비, 및 학교운영방침을 가지고 있다. 특수목적학교, 사립학교, 및 종교학교라고 할지라도 공립학교에서 실시하는 일반적인 교육과정에 약간의 수정을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므로 그 독특한 특성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육운영상 독특한 성격을 갖지 못하는 특수학교는 단지 입시 준비학교의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학교의 평준화는 학교 시설 설비의 평준화를 지향하고, 학교 교육과정 및 학교 운영방침에 있어서는 특성화를 추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수목적학교, 사립학교, 및 종교학교는 각각의 교육과정 및 운영방침에 있어서 공립학교와 차별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학교의 특성화를 위하여 정부에서는 각 학교에 대한 규제와 통제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생에게 주어지는 정부보조금에 의해 학교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우, 학부모와 학생들은 교육권을 최대한 보장받게 된다. 학생들이 학교를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채택되면, 학생들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교육내용과 수업방법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립학교와 종교학교는 공립학교와는 다른 강화된 종교적, 도덕적 교육과정을 제공할 수 있고, 사회에 다양하고 창의력 있는 인력을 배출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업방식과 독특한 교육과정은 많은 학생들에게 균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편 사회는 다양한 특성과 신념을 가진 사회인을 적은 비용으로 양성할 수 있게 된다(노종희, 박정애, 1999).
학교 선택권 확대 주장은 선택제 학교들이 학생들의 학습 성적 향상과 학문적 능력 및 태도 발달에 관심을 둔다(Hill, 1995; 노종희, 박정애 재인용, 1999)는 연구에 의해서도 지지될 수 있다. 다음은 이 연구에서 선택제 학교들의 특징으로 제시한 것이다.

(a) 학교의 인상을 좋게 하려고 하고, 학교의 명성을 창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장과 교사에 의하여 학생들은 영향을 받는다.
(b) 학생들은 학교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c) 학생들은 학생들에게 계속적인 요구를 하는 학교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d) 학교 선택제는 헌신을 요구하고 스스로 높은 가치를 평가하는 학교분위기를 가지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이익을 얻는다.
(e) 학교 선택제에서의 학교는 성공이 학교의 성취도와 연관이 되고, 이러한 성취지향적인 교직원이 근무하는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익을 얻는다. 성취지향적인 교직원들의 환경은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보이고 있으며,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구 사회의 선택권 확대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주호는 평준화 정책의 개선은 학교 선택권의 확대를 넘어서서, 학교 차이의 인정, 학교 정보의 공개, 학교 자율의 확대, 학력부진학생에 대한 정부지원 강화 등 다면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주호, 2002). 학교선택권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되, 학교선택권을 인정하는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들이 공존하는 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 사학의 경우 자립형 사학, 공립의 경우 자율학교 및 협약학교를 중심으로 학교선택권을 빠르게 확대하고, 그 다음으로 사학의 경우 자립능력이 없는 사학에 대하여도 학교선택권을 허용하는 방식을 도입하여야 한다.
그러나 학부모와 학생에게 학교 선택권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학교에 대한 다른 주요 기능이 획일적으로 규제되어 다양한 학교가 출현하지 못하고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확대된 선택권의 의미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 자율을 확대하고 그에 따른 책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부가 평준화 정책의 보완 대책으로 시행하였던 특수목적고등학교 제도가 크게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이유는 대학 입시에서 학교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특목고 학생들이 대거 자퇴하는 사태까지 초래하였던 것이기에 대학 입시에서 학교간의 차이까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주호, 2002).
우천식도 사회 변화에 따른 다양한 교육 수요를 위해 학교 선택권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인력 수요는 계속 다양화 고급화되고 있으며 고질적인 학력・학벌주의의 폐습도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사회변화의 물결 속에 빠르게 붕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이에 따라 학부모와 학생의 교육 수요도 다양화 차별화되고 있는 추세이며, 학교 선택권의 확대는 이러한 다양한 교육관과 교육 수요가 수용될 수 있는 여지를 넓히는 근본적인 조치라는 것이다(국민일보, 2002년 03월 18일)
이러한 주장은 학부모들의 학교선택 수요분석과 같은 실증적인 연구로 어느 정도 뒷받침되고 있다. 김영화, 이정희(2003)의 학부모의 학교수요분석은 학부모들이 고교평준화제도를 지지하면서도 학교선택제에 대해서는 현상 유지나 확대하자는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학교선택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택할 의사가 있는 학부모는 91.7%에 달했으며, 선택할 의사는 부모의 학력과 직업지위에 관계없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학교선택기회를 확대하라는 주장의 주요 논거가 되고 있다(김영화, 이정희, 2003).

2) 학교 선택권 확대에 대한 반론

이러한 학교 선택권 확대 주장에 대해 평준화 유지론자들은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먼저, 김용일은 ‘학교선택권’, ‘다양성’, ‘자율성’이란 말은 한국의 사회ㆍ정치적 맥락 안에서 검토하면 ‘특별한 사립학교’를 도입하자는 ‘편협한’, ‘무절제한 욕망의 교육적 표현’, ‘이기적 욕망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김용일, 2002). 영국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얻은 결론은 ‘선택과 다양성’을 내세운 학교정책이 계층ㆍ인종간의 불평등을 유발시켰을 뿐, 학교의 다양성은 물론 학생의 학업성취에서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계층 차별적인 편협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선택권 주장은 본고장에서 이미 폐기된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한층 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의도라고 비난한다.
성기선(2002a)은 감신대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에서 선택권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입시에 대한 열풍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교육열“이 지나칠 정도로 과열되어 학교가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학교교육의 주요 목표를 학력 성장에 두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각종 비교육적 양상은 매우 심각한 교육적,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어 왔다. 더욱이 학교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은 한국 상황에서의 선택권 확대는 학력 위주의 학교 선택,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몰리는 학교 선택, 대학 진학을 위한 억압적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 대한 선택을 의미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집단이 어느 정도인가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학교선택권 주장은 기존의 계층에 의한 학업성취도 격차를 공교육제도를 통해 더욱 확대시키고자 하는 중상층 계층의 이해관계로부터 비롯되고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학교선택권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평준화 체제 하에서 학교 단위에 자율권을 대폭 부여하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가능할 수 있는 지원체제 확립이 선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성기선, 2002).
김천기(2002)도 같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평준화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다양화는 성적의 차이에 따라 집단을 구분하여 다르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교육의 다양화라는 명분으로 성적의 순위에 따라 차등화된 교육을 하자는 사람들은 국가경쟁력 강화의 필요성을 내세우지만 결국 성적우수자들이 지위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고등학교부터 차별화된 교육을 받도록 하자는 데 그 의도가 있지 않은가 지적한다. 사실 한국사회 속에서 성적과 사회계급이 비례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결국 사회의 중상류계급은 성적이 우수한 자신의 자녀들이 일류학교에서 교육받도록 하고자하는 욕구에서 교육의 다양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김천기, 2002).
이들 평준화 유지론을 종합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한다. 먼저, 학교 선택권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다양성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성적 우수자 동질집단을 위한 일류학교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제한다(김천기, 2001). 영국의 예를 보면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이다(김용일, 2002).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비판 논리를 전개한다.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성적 우수자가 대체로 중상류 계층의 자녀이며, 따라서 학교선택권 요구는 중상류 계층(또는 특권층)의 이기적 욕망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김용일, 2002). 고등학교에도 서열화가 생기며(한만중, 2002), 우수하지 못한 학생들이 몰려있게 되는 공립학교의 학교문화나 수업 풍토 등이 비교육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한다. 학급 단위의 동질집단 구성, 수준별 교육과정이 격차를 더 벌리고, 학교 단위의 동질집단 구성은 더 큰 부작용을 파생시킨다(김천기, 2002)는 주장도 같은 맥락의 비판이다. 이들은 대안으로 학교 내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물론 이것은 수준별 교육과정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과서 자유발행제와 단위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한만중, 2002)

3) 비판적인 검토

먼저, 학교 선택권 확대를 반대하는 평준화 유지론의 전제, 즉 ‘다양성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성적 우수자 동질집단을 위한 일류학교를 요구하고 있다’는 주장과 그에 근거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인 성적 우수자가 대체로 중상류 계층의 자녀이며, 따라서 학교선택권 요구는 중상류 계층(또는 특권층)의 이기적 욕망의 산물에 불과하다(김용일, 2002)는 지적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장과 달리 학교 선택권을 요구하는 주장에도 차이가 있다. 학교 선택권 확대 주장에는 자립형 사립학교 말고도 농어촌의 특성을 살리는 자율학교나, 학습 부진아나 부적응자를 위한 대안형 자율학교 주장, 다양한 특기를 길러주거나, 독특한 교육 이념을 실현하려는 특성화 학교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주장까지 ‘다양성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성적 우수자 동질집단을 위한 일류학교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명백히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실제로 김영화, 이정희(2003)의 학부모의 학교수요분석에 따르면, 원하는 학교를 지원·선택할 수 있는 고교 선발방식을 76.1%의 학부모가 매우 희망하거나 희망하는 편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지위가 높을수록 비율이 높았으나 아버지의 직업지위가 하인 경우에도 69%가 희망하는 쪽이었다. 특히 특성화고교는 아버지의 직업지위나 학력이 낮을수록 선호하였다. 아버지의 학력이 고졸 이하인 경우 71.8%가 진학을 희망하였다. 학교선택시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교육과정(41.4%)이 대학진학율(23.8%)보다 응답률이 높았다. 다양한 형태의 자율학교에 대한 수요는 조사되지 않았지만, 다양성에 대한 요구, 학교 선택권에 대한 요구가 성적 우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란 점이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의 비판이 맞는 경우도 있다. 이주호, 우천식, 교육개발원, 교육부의 견해가 대체로 그러하다. 서두에서 제시한 여러 입장 중 자립형 사학 확대 주장이 대부분 수월성 향상, 성적 우수자를 위한 고려라는 지적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학교선택권 요구 중 특히 자립형 사립학교에 대한 요구가 주로 중상류 계층(또는 특권층)의 요구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뒤에 자세히 언급되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진학수요 결정요인을 분석한 김경근(2001)의 연구를 통해 사실적으로 뒷받침된다. 결국 전제는 부분적으로 타당하고 부분적으로 옳지 않다.
종합한다면, 위에서 제기한 어떤 비판 논리로도 학교의 다양성과 선택권 요구 자체의 정당성은 부정될 수 없다. 다만 선택 범위를 어디까지 하는가 하는 점이 쟁점이 된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러 주장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은 학교선택권확대 요구로 규정해 버리는 왜곡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라도 선택권을 허용하게 되면 그 이상의 선택권 확대 요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설사 학교 선택권 요구가 중상류 계층, 성적 우수자 집단의 요구라고 하더라도 검토가 끝난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러한 요구가 사회 정의에 어긋난 부당한 이기적 요구인가 하는 점이 논증되어야 한다. 사회에 피해를 주는 이기적 요구라는 점이 증명되려면 자립형 사립학교, 특목고, 자율학교 등을 통해 사회계층적 구조가 재생산된다고 하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반대론자들은 보통 서구사회의 귀족형 사립학교가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는 주장을 논거로 삼는다. 자립형사립고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어느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수업료가 비슷한 특목고, 특성화 고교, 기타 자율학교까지 사회정의에 어긋난 이기적 요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선발 방법으로 성적이 아니라 추첨이나 학생의 적성, 특기를 고려한 면접 등을 주로 사용한다면 비판의 상당 부분은 근거가 부족해진다. 다만, 외고, 과학고 등의 특목고는 관련된 과목의 성적을 부분적으로라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외고, 과학고 지망생을 추첨만으로 선발할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학교 선택권의 일부 대상인 자립형 사립학교에 대한 우려가 학교 선택권 자체, 학교의 다양성과 이를 위한 자율성의 필요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정리할 수 있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다양한 교육과정이 준비된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면 오히려 학교 선택은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부작용이 예상된다면, 여러 대안을 통해서 그러한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도 검토해야 한다. 이와 결부되어, 평준화 제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교육은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가 하는 의문도 함께 제기될 수 있다. 이렇게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이 글의 다음 장 이념적 쟁점에서 좀더 다루기로 한다. 하지만 사교육에 관한 검토는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기에 다루지 않는다.
두 번째 비판을 검토하자. 고등학교에도 서열화가 생기며(한만중, 2002), 우수하지 못한 학생들이 몰려있게 되는 학교의 문화나 수업 풍토 등이 비교육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평준화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면 대학과 같은, 평준화 도입 이전과 같은 서열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교육적인 풍토의 학교가 나타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현재 대학 진학을 포기한 학생이나, 미래의 전망이 불확실한 실업계 고교의 상태를 보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평준화를 전면적으로 해제하거나 대폭 손질하는 경우, 게다가 성적 위주로만 학생을 선발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평준화 골격을 유지하면서 소수의 수월성 추구를 위한 학교가 존재한다거나, 다양한 특성을 지닌 학교들이 다원적 경쟁을 할 경우에까지 이러한 비판은 적용되기 힘들다. 현재 특목고, 과학고 몇 개가 있다고 고교 서열화가 심각하다던가, 평준화가 유지되는 나머지 학교에서 특목고 설립 이후에 비교육적인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선발 방법으로 성적이 아니라 추첨이나 학생의 적성, 특기를 고려한 면접 등을 주로 사용한다면 비판의 상당 부분은 근거가 부족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 역시 지나친 평준화 해제 주장과 잘못된 운용에 대한 비판이지 학교 선택제 자체를 부정하는 충분한 논거가 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검토를 종합한다면, 학교 선택권 요구를 ‘편협한’, ‘무절제한 욕망의 교육적 표현’, ‘이기적 욕망의 산물’, 사회 정의에 어긋난 ‘교육의 시장화’, ꡐ신자유주의ꡑ라고 단정하면서 비난하기보다는 그 의의를 인정하고 우리의 사회・문화적 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방지하는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면서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립형 사립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주장을 근거로 교육의 다양성, 학교의 자율성, 이를 바탕으로 한 선택권의 요구까지 싸잡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은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학부모들과 동료학자들에 대한 인격적 모독이다.

4. 사학의 자율권

사학은 자율성, 특수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자율성, 특수성이 없다면 사학은 준공립 학교에 지나지 않는다. 사학 운영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평준화 정책은 국가가 개입하여 교육과정, 교육내용과 선발, 학교 운영방침 등의 골격을 규정하기에 사립학교의 기본적인 속성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들은 학생의 학교 선택권 보장과 다양한 교육, 조기 해외유학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하고, 학교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학교의 다양성 교육과정 보장 및 학생의 선발과 등록금 책정에 자율권을 갖는 자립형 사립학교의 확대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담고 있는 한 언론의 사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육계 일각과 야당의 주장처럼, 국・공립은 계속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고 사학들에는 자율성을 부여하는 이원화된 교육체제로 전환하자는 의견은 그런 측면에서 현실성을 인정할 만하다. 사립의존도가 학교수에서 51%, 학생수는 56%나 되므로 모든 사학을 한꺼번에 자율화하는 것도 무리다. ‘자립형 사립’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전체의 20% 정도 되게 하면 학업우수학생들의 해외 조기유학 욕구나 공교육 불신에 따른 사교육 열풍을 크게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학을 자율화하면 국・공립이 위축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기우다.”(조선일보 2002.3.3. 사설).

사학의 자율성과 관련하여 한국사학재단연합회는 사립학교가 국가 정책의 구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을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이러한 사립학교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평준화 정책 아래에서 사립학교가 공립학교와 다른 교육을 운영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이러한 국가적 개입이 온당한가 하는 점은 분명 짚어야 할 쟁점이 된다. 그리고 사실 그 동안 사립학교 법인들이나 학교장 단체 등이 사립학교의 자율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견지에서 사립 고등학교를 평준화 정책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는 요구를 계속 해왔다(한국사학재단연합회, 1975; 강태중, 재인용, 2002).
이에 반해, 평준화 유지론자들은 평준화가 사학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사학운영의 자율성을 약화시킨 주요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평준화가 사학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한다. 평준화제도는 학교간 교육여건의 평등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영세한 사립학교들의 교육여건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평준화 시기에 이・삼류로 분류되던 사립학교들이 평준화 시행으로 이・삼류 낙인이 없어지고, 지역의 탄탄한 학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비평준화 지역의 대부분의 사립학교는 비평준화 제도로 인하여 학교 경영의욕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소도시일수록 공립학교에 대한 선호도가 강해서 사립학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며, 만약 평준화가 해제된다면 사립학교의 위상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최돈민,1998). 또한 사학운영의 자율성을 규제하는 국가 통제적 요인들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평준화가 사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평준화가 사학의 선발에서의 자율성을 제한한다는 비판에 한해야 타당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평준화로 인해 사학의 자율성이 침해된다는 주장은 입시명문고로 부상하고자 하는 일부의 사학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학의 자주성과 자율성, 사학의 학생 선발의 자율성도 보장되어야 하나, 사립학교에 대한 평준화 해제가 여타 공립학교와 중등교육의 정상화에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면 이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김천기, 2002)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는 몇 가지 검토해야 할 점이 있다. 먼저 평준화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지만, 위 주장은 사학의 선발권을 제한하는 평준화와 사학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혼동하고 있다. 현재 비평준화 지역의 사학도 국가의 재정 보조를 받고 있기에 교육 여건 개선은 평준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다만 학생들을 성적에 관계없이 배정하기에 이・삼류로 분류되던 사립학교들이 평준화 시행으로 이・삼류라는 낙인이 없어지고,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도 성적 우수 학생을 위한 목적이나, 특성화된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하려는 사학에 대해서까지 자율적인 학생 선발권을 제한하는 주장의 논거는 되기 어렵다.
국가 통제가 사학 자율성을 제한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사학의 교육과정과 선발의 자율성,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은 교육과정에 대한 국가 통제를 완화시키지 않으면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교육과정에 대한 국가 통제의 완화를 전제로 한다. 또한 다양하게 특성화된 교육과정, 대안적 교육과정은 학생의 선택권과 자율적 선발권을 논리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육과정에 대한 국가 통제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교육을 추구하자는 주장은 매우 타당성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김천기(2002)도 사학의 자주성과 자율화는 건학 이념에 따라 특색 있고 다양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전제 아래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취지에서, 자립형 사립고는 부정하지만 대안학교는 인정한다. 특히, 학교 서열화를 막기 위해서 성적의 우열에 따른 선발을 비판한다.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면, 먼저 교육과정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완화되고 학교의 자율성은 확대되어야 한다. 특히, 완화된 규제, 즉 최소의 기준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공립학교라는 경로를 통하던가, 과다한 재정 지원을 받는 사립학교를 통해야 한다. 특성화된 교육을 하려는 사립학교는 재정 지원은 하되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아울러, 사립학교는 건학이념을 철저하게 반영하여, 부분적으로 학생을 자율 선발하고, 국가는 사회 전체나, 공립학교 교육에 커다란 부작용을 미치는 않는 한도 내에서 교육과정과 학사 운영도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만약 건학 이념을 고려하여 학생을 선발하되, 지망 학생수가 너무 많으면 무조건 성적순이 아니라 전체 학생 또는 일정 기준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추첨하여 선발하거나 면접을 많이 활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율성이 보장되는 다양한 특성화 고교와 대안학교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확대되어야 한다. 다만,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등록금 책정권을 지닌 자립형 사립학교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Ⅲ. 평준화와 관련된 이념 대립 검토

평준화 제도에 대한 논쟁의 뿌리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념이나 계층간의 대립이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평준화 유지론자들의 관점이다. 평준화 제도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구별, 즉 이념간의 대립이나 계층간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쟁점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그 타당성을 확인하고 시사하는 바를 찾아보자.

1. 자유와 평등

박남기(2002)는 현재 첨예화되어 가고 있는 고교 평준화 기본틀 유지 찬반론의 바탕에는 자유와 평등의 대립 관계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즉, 고교 평준화 논의는 고등학교 교육 체제 개편 논의 혹은 입시제도 개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 중 어느 이념을 더 중시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평준화 정책이 사회주의 정책에 다름없는 것이라고 기술하면서, 사회주의 정책이 사회를 ‘평준화’하려 하였던 것이고 그래서 ‘사망’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평준화 정책은 경쟁의 자연 법칙(즉, 자본주의 원리, 자유 경쟁)을 무시하는 것으로, 지속된다면 역시 사망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강태중, 2002. 04: 13 ; 박남기 재인용, 2002).
김용일은 교육복지정책과 관련해서는 ‘작은 정부’, 그러나 편협하고 이기적인 정책실험에서는 ‘강한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본모습이며, 시장 메커니즘으로 공교육을 재편하고, 학교를 민영화하려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공교육재정 감축’을 개혁의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교육의 사사화(私事化)’를 도모해왔다고 주장한다(김용일, 2002a). 학교운영위원회를 도입하는 데 참여민주주의 논리를 동원하고, 교육과정에 보수주의적 가치를 대폭 수용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제7차 교육과정, 교사 성과상여금제, 자립형 사립고 도입, 교원정책 등을 둘러싼 논란과 공방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교육 내실화, 교육의 공공성 확대, 소비자 주권이 아닌 사회적 기본권으로서의 교육권, 단위학교 민주화, 교육 불평등의 개선 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평등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주호(2002) 등이 학생과 학부모의 자유로운 학교 선택, 학교의 자율성 보장을 통한 다양성 확보, 학교에 대한 정보 공개, 학교간의 경쟁 등을 강조한 점에서 현행 평준화 제도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를 중시하는 면이 있다는 지적은 적절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박남기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는 아탈리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은 민주주의를 확산시켰으나 이제는 신자유주의 이념과 세계화라는 괴물을 등에 업고 자신이 키워온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시장 독재를 향해 가고 있다(2001: 49). 시장은 가난한 다수 집단에 불이익을 주는 데에 반해서, 민주주의는 부유한 소수 집단에 불이익을 주는데, 시장의 이데올로기가 부유하고 참을성 없는 소수 집단을 부추기면, 그들은 자기네가 다수파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다수의 행복과 민주주의 제도의 유지가 자기들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자기들의 이익을 관리하는 덜 부유한 다수 집단으로부터 그 권리를 도로 빼앗아 가기로 결정할 것이고 (2001: 53-54), 그러면 자유 유토피아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소외와 기회의 불균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는 가장 가난한 계층의 대대적인 반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2001: 165). 실제로 자유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불평등과 불안정의 심화를 막을 수 없고, 역으로 평등은 자유의 폐허 위에서만 나타난다 (Attali, 2001: 90). 그 결과 21세기에 들어 자유와 평등의 대립이 그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박남기, 재인용, 2002)고 인용한다.
그러나 박남기의 주장에는 교육 평준화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자유와 평등이 대립하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계속하여 아탈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대립’, ‘가장 가난한 계층의 대대적인 반란’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하여 그 심각성을 부각시킨다. 나아가 대안으로 ‘자유와 평등 유토피아의 조화’를 내세운다. 그는 시장 논리를 강조할 경우 “부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고약한 일은 시장이 가난한 자들을 만들어 낼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부자들의 자유 행사와 소유권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에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유 유토피아를 평등 쪽으로 밀고 가야 한다”는 아탈리의 주장(Attali, 2001: 105 ; 박남기, 재인용)을 기초로 삼는다. 결국, 학교 교육보다 더 타당한 잣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부모의 배경이 학교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최대한 차단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대안은 자유와 평등의 조화가 아니다. ‘자유와 평등 유토피아’가 아니라 ‘평등 유토피아(?)’이다. 박남기의 주장에는 구체적인 대안이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김용일의 주장은 평준화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과 개선 요구까지 차단하며 이념 논쟁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용일의 주장을 축약한다면, 신자유주의는 불평등을 확대하기에 나쁘다. 평준화를 비판하면서 다양성, 자율,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결국, 자율성, 다양성, 선택을 언급하기만 하면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 되는 셈이다. 심지어 학교자치를 위한 학교운영원회마저도 신자유주의의 결과물이라고까지 주장한다(김용일, 2000). 결국 자신들의 주장과 조금이라도 다른 주장과 논리를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면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흑백논리식의 단순한 설명 방식은 의도적인 선전과 비난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의 건설적인 해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학교 선택권의 확대, 학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입장이 반드시 자립형 사립고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며, 무절제한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거꾸로 무조건 평준화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켜 남이 조금이라도 잘 하려는 것을 배아파 하는 이기적 욕구의 산물이며, 획일주의적인 평등교육이라고 하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면 자신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왜곡하고 부족한 근거를 가지고 부도덕하다고 매도하는 방식의 학문 풍토는 이제 버려야 한다.
오히려 입시제도가 내신 성적을 중시하면서 대학입시에 평준화가 더 유리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평준화를 더 지지하게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입시제도에서는 오히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한 사례를 들면 2003학년도 서울대 수시 모집에서 국제 정보올림피아드 금메달, 동메달 수상자인 과학고 재학생이 내신성적이 뒤져 1차에서 모두 탈락한 것(한겨레신문, 2002년 11월 12일)은 그러한 판단이 타당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물론 메달만 수상하면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이 내신 산출 방식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면 이는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입시도 아니며,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한 선발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 결국 서로 유리한 조건의 제도를 얻어내려는 세력 다툼의 싸움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은 문제의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좀더 실증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평준화에 관한 논의가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 구체적 방안, 평준화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재능과 요구를 길러줄 수 있는 교육적 방안 모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에 적합하고, 그 현실을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타당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더욱 간절하다.
이런 점에서 김영화의 주장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김영화(2002)는 공교육이 추구하는 ‘능력에 따른 교육평등관’은 획일적・일원적・수직적 능력관에 기초한 교육평등관에서 다원적・수평적 능력관에 기초한 교육평등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기초적인 자질을 획득한다는 전제(교육 결과의 평등) 아래 다양한 재능과 적성과 희망하는 진로와 필요에 따라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구에게나 보장해 주는 것이 현대 사회에 적합한 ‘능력에 기초한 평등관’이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립학교는 국가의 지원과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공립학교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의 운영을 허용,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많은 학생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취약계층의 자녀에게 일정 비율을 할당한다든가, 성적이 아니라 추첨 선발을 하는 등의 보완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학교간 다양화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도 학생들의 개인차를 고려하는 교육프로그램의 활성화를 위한 제반 지원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김영화, 2002).
사립학교 모두를 국가의 지원과 규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는 없지만 김영화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나아갈 자유와 평등의 조화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 계층간의 대립

이미 앞에서 확인하였듯이 평준화 제도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비판은 성적 우수자가 대체로 중상류 계층의 자녀이며, 따라서 학교선택권 요구는 특권층의 이기적 욕망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김용일, 2002b ; 한만중, 2002). 김용일은 자립형 사립고는 ‘특권층 학교’라고 단정하며, 현재 ‘특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규모는 일반계 고등학생의 3.8%라고 설명한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질 수 없는 것임을 실감케 하는 수치라는 설명을 덧붙힌다. 학교 선택권 요구는 자립형 사립고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특권층 그것도 일반계 고교 학생수의 3.8%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김용일, 2002b). 현실을 왜곡하는 가까운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또 이성은“비평준화를 원하는 인식의 저변에는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고, 학습 능력이 있는 집단이 자기들끼리 모여 연줄과 패거리 문화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 2001. 05).
하지만 연구 결과는 이와 다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김경근의 연구는 전체 학부모의 2/3 이상이 자녀를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에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찬성과 반대라는 쟁점을 떠나 그런 학교가 존재한다면 자녀를 보낼 의사가 있다는 비율이다. 한 줌도 안 되는 소수 특권층의 편협한 이기적 욕망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수치인 것이다. 만약 자립형 사립고가 아닌 자율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다양한 특성을 지닌 학교를 찬성하는지, 또 있다면 자녀를 보낼 것인가를 묻는다면 아마 훨씬 더 많은 비율의 학부모가 긍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이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김영화, 이정희(2003)의 연구에서 실제로 확인되고 있다. 학교 선택권 요구, 평준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쉽게 단순화할 수 없는 논거이다. 그것도 일반계 고등학생의 3.8%라는 주장은 지나친 왜곡이라는 인상을 준다.
또 중류층이 아닌 상류층이라도 내신 성적이 중요한 현입시제도에서는 굳이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에 보내지 않으려는 학부모의 비율도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이런 제도에서 자녀를 특목고에 보낸 학부모들은 내신에서의 불리함보다 실력 향상을 통해 수능에서 이를 만회하려는 경우일 수도 있지만, 자녀의 독특한 재능과 요구를 고려하여 입시에서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진학시킨 면도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을 소수의 특권층 자녀로 단정하기에 앞서 실증적 조사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이는 별로 어려운 연구가 아닐 것이다. 같은 지역의 일반계고교와 특목고 학생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비교해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은 학교 선택권 요구의 본질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선택권 요구를 특권층의 이기적 동기로 규정하여 하류층만이 아니라 중류층까지 포함한 국민의 반감과 경계심리를 자아내려는 정치적 동기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역시 김용일(2002)은 ‘학교선택권’, ‘자율성’,‘다양성’이란 가치를 내세워 “닫힌 사회”를 만들어 갈 궁리만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판한다. 나아가 이를 지식인들의 “의식의 퇴행현상”이라고 단정하고 있다(김용일, 2002a). 이것은 거의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막 가자’는 식의 도덕적인 비난이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이념적, 계급적 대립과 비판이 아닌 비난으로 논쟁을 이끌어 가는 것은 교육적 적합성을 고려하기 어렵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립형 사립고만에 관한 논쟁으로 논의를 제한하거나, 자립형사립고 비판 논거를 가지고 다양성과 자율성 논의를 모두 비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더욱이 이란 방식의 논쟁은 여러 형태의 다양한 주장을 봉쇄함으로써 현실적인 대안의 성립 가능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아울러 이와 관련한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한 주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개인이 자신의 실력을 통해, 학업 성취를 통해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 사회 정의에 어긋난 부도덕한 행위인지를 먼저 규정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학력을 사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한 능력 향상, 학업 성취, 특정한 재능의 향상이라는 경로를 통했다면 그래도 과연 부도덕한 것인지 심각하게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를 부도덕하다고 할 수 없다면 학교 선택권, 선발권을 인정하면서 학업성취와 다양한 능력을 통해 선발하게 하는 것도 부도덕한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일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가능성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 옳은지,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학벌사회의 폐단을 없애고, 저소득층 자녀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하려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옳은지는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더욱이 특목고, 자율학교 같이 등록금의 차이가 별로 없이 특성화된 교육을 제공해 달라는 요구마저 상류층의 부도덕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일부 부작용이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보완책은 당연히 마련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부 부작용을 근거로 그러한 행위에 무절제한 이기적 욕망이라는 주홍글씨를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등록금에 있어 3배의 차이가 나는 자립형 사립고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므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3. 지식 산업과 세계화에 대한 대응

박남기는 지식 산업과 세계화에 대한 대응 방법의 차이를 주요 쟁점으로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고교 평준화 찬반 논의를 살펴볼 때 다가오는 시기가 지식산업 시대, 세계화 시대가 되리라는 데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의 개념, 그리고 그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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