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깡’은 살아있다

정유진·심혜리·박효재·이서화 기자

두발 규제·강제 ‘야자’… 수십년 변한 게 없어

성적주의에 면죄부 “기성세대 인식 바꿔야”

25년 전,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소녀는 유서에 “난 내 동생들을 방황에서 꺼내줘야 해. 나의 죽음이 남에게 슬픔만 주는 헛된 것이라면, 난 가지 않을 거야”라고 적었다. 자신의 죽음이 사회에 경종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2011년, 대한민국 학교는 변한 게 없다. 경향신문이 서울지역 초·중·고교 4개 학급에 ‘학교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돌린 설문지에는 25년 전 아이들의 고민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학교는 우리에게 등급을 매긴다. 그렇지만 우리는 쇠고기가 아니다.” “누구나 공부 잘하고 싶지, 못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우리랑 역할 바꿔볼래? 우리가 얼마나 괴로운지….” “만날 말로만 성적으로 차별 안 한다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뻔한 거짓말.” “학원 반대! 학원을 다녀도 성적은 그대로. 토요일은 쉬자!” “약간의 개성을 살려 옷을 입고 싶은 학생의 마음을 왜 헤아리지 못할까.” “잠을 자고 싶다….”

학생인권 문제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개선해야 한다”고 동의하면서도, 수십년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어른이 되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성적이 한 등급이라도 오를 수 있다면 아이가 잠을 좀 덜 자는 것은 상관없는 부모들, 명문대에 한 명이라도 더 보내 학교 이름을 빛낼 수 있다면 학생들을 억눌러도 된다는 학교와 교사들은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 앞에서 면죄부를 받는다.

인천 ㅅ고교는 지난 3일 두발검사에서 적발된 학생들을 모두 학교 밖으로 내쫓았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고 올 때까지 교문 안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했다. 포항 ㄷ고교 학생들은 방학 때도 매일 오전 9시까지 학교에 나와야 했다. 인천 ㅈ중학교는 보충수업 신청서의 부모님 동의란에 학교 측에서 마음대로 ‘동의’한 것으로 표시했다. 학생들이 “나는 보충수업을 듣지 않을 건데 왜 강제로 체크하느냐”고 항의하자, 학교 측은 “계속 문제 제기할 경우 징계하겠다”고 했다. 이번 학기부터 학생인권조례를 시행, 강제 야간자율학습을 금지한 경기지역에서도 “여전히 강제 ‘야자’를 시킨다”는 신고가 이어지고 있다.

학교는 웬만한 기업보다 더 철저한 성과제로 운영된다. 우등생은 온풍기가 설치된 특별 자습실에서 공부하고, 열등생은 김이 나오는 추운 교실에서 공부한다. 이 같은 부조리를 학생들은 견뎌야 한다. 가장 교육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학교가 가장 비교육적이고, 비민주적인 공간이 됐지만 저항은 꿈도 꾸기 어렵다. 학생들의 인권은 대학에 입학하는 그날까지 유예돼 있기 때문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옛날에는 한 교실에서 70~80명이 수업을 받았으니 획일적 통제방식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성세대가 가진 학교와 교실에 대한 개념을 해체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의 저자 김민아씨는 “인권은 유예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청소년은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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