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는 헌법정신 아니다… 민주주의로 되돌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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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1.10.07. 오후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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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7일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주요 역사학회 주최로 열린 2011 역사교육과정 개정 관련 학술토론회에서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가 개정 역사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ㆍ역사학계 토론회

국내 대표적인 한국사 학회와 역사교사 단체들이 7일 서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초·중·고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서술과 민주주의’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011 역사교육과정 개정 고시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무단 변경한 것이 토론회를 열게 된 배경이다. 토론회에는 한국근현대사학회·역사교육연구회·역사와교육학회·역사문제연구소·전국역사교사모임·역사교육연구소·한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 등 8곳이 참여했다.

토론회에 참가한 학자들은 “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다”면서 ‘민주주의’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앞으로 역사교과서를 정치와 이념 공세로부터 지켜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활동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오는 17일 집필기준 시안 공청회, 28일 한국현대사학회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의 토론회, 다음달 4~5일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계속 개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배용 역사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역추위) 위원장과 사학계 원로들의 면담을 주선해 학계의 우려를 전달할 계획이다.

이날 토론회에선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와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이인재 연세대 원주캠퍼스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발표를 맡았다. 토론에는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지수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참여했다.

■ ‘자유민주주의’ 헌법 전문에 없어

역사학자들은 10차례 제정·개정된 헌법 전문 어디에도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롭고 민주적’이란 뜻으로,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한정할 경우 민주주의의 풍부한 의미를 축소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인재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자고 건의한 한국현대사학회는 자유민주주의가 헌법정신의 발로라는 점을 강조해왔다”면서 “그러나 헌법을 살펴본 결과, 유신헌법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쓰였지만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원사료에 충실해야 하는 역사학적 판단으로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도 지나치게 축소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국가보안법 7조 1항의 찬양고무죄를 다룬 1990년 헌법재판소 판단을 들었다. 당시 헌재는 결정문에서 “제6공화국 헌법이 지향하는 통일은 평화적 통일”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위하여 때로는 북한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함도 불가피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에 비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의미를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헌법학자인 오동석 교수는 “헌법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등장한 것은 1972년 헌법”이며 앞서 같은 맥락의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1960년 헌법에서 등장한다고 말했다. 1960년 개헌 당시 정헌주 개정안 기초위원장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경제적 질서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국현대사학회 권희영 회장은 앞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쉽게 얘기하자면 공산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민주적 절차와 ‘시장경제’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라고 설명한 바 있다.

오동석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은 그 통일적 해석과 제·개정사를 되돌아보더라도 사회적·경제적 약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며 “따라서 최근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반공주의와 전투적 시장경제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려는 시도와는 완연히 대립된다”고 말했다.

■ ‘자유민주주의’를 사용하는 이유는

참가자들은 국내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명확한 개념이 정리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의 논란은 이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인재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전파하며 군부독재세력을 산업화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11년 현재 친일세력과 군부독재세력, 이른바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산업화세력’들이 한국현대사를 왜곡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박태균 교수는 “냉전적 보수세력들은 한국현대사를 ‘건국 → 산업화 → 민주화 → 선진화’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을 핵심 아젠다로 설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는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 시대 구분은 해당 시기 아젠다를 수행한 사람들과 그 정부, 즉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를 높이 평가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지수걸 교수는 “ ‘자유민주주의’를 제안한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보면 그들의 의도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넣는 것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강조하자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지 교수는 “그러나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수호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반공 군사독재’였다”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반북·멸공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자는 사이비 민주주의였을 뿐 민주주의로 간주됐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 위원회 구성과 절차적 비민주성의 문제

학자들은 비상식적인 위원회 구성과 절차상 비민주성도 지적했다. 최종 고시 권한이 교과부 장관에게 있다고 하지만,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 회의체를 뒀음에도 촉박한 일정을 핑계로 권한을 임의로 행사한 것은 교과부 장관의 재량권을 넘는 행위라는 것이다.

오수창 교수는 “최종안의 완성까지 자구 하나하나를 점검했던 역추위가 중요한 사안을 임의 변경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주진오 교수는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브랜드위원회의 이배용 위원장이 역추위 위원장이 된 것부터 역사교육과정에 정부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역추위에서 사퇴하지 않고 남은 위원에 정부 측 인사가 4명, 현대사학회 회원이 2명, 이해당사자인 역사교과 집필기준 위원 2명이 포함된 점을 감안하면 이 위원회는 당장 활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학자들은 “정부가 속도전을 치르는 이유는 현 정권 임기 내에 역사교과서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 위한 것”이라며 “역사교육과정 개정 고시안을 철회하고 지금부터라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역사학계와 현장교사들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 역사교육과정

역사교육의 목표와 내용 등 대강의 얼개를 정해주는 ‘역사교육의 설계도’라 할 수 있다. 역사교육과정이 정해지면 이에 따라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지고 실제 수업과 평가를 하게 된다.

▲ 역사교육과정 개발 정책연구위원회

국사편찬위원장이 대학교수와 현장교사로 구성한 정책연구 실무진이다. 위원은 총 24명으로 임기는 연말까지지만, 최종 고시안을 제출해 역할이 끝났다.

▲ 역사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교수와 교사, 교과부·국사편찬위원회 담당자로 구성했다. 역사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대한 검토·자문을 담당한다. 위원은 총 20명이지만 9명이 교과부의 용어 무단 변경에 항의해 사퇴했다. 임기는 연말까지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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