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학생들의 삶을 더욱 피폐화시키는 3불 정책 폐지 안된다
서울대장기발전위원회와 사립대학총장협의회가 3불 정책 폐지를 잇달아 주장하고 나선 이후 교육단체, 정치권, 네트즌들에까지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3불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예전과 달리 논란이 더욱 확산되고 폐지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정권 말기의 어수선한 틈을 타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불 정책은 정치적인 세몰이 방식으로 얼렁뚱땅 뒤집어도 될 사소한 정책이 아니므로 교육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사회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육과 시민사회는 3불 정책의 어느 것 하나도 현재의 교육 상황에서는 허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대학의 뚜렷한 서열화가 유지되고 있고, 명문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경쟁으로 중등교육이 파행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3불 정책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입시 전쟁에서 피흘리고 있는 어린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욕망의 발로이다. 내신과 수능, 논술과 면접이라는 이중 삼중의 걸름 장치를 통해 학생들의 줄세우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또 다른 판별 장치를 만들겠다는 것은 대학의 선발 전문성이 없다는 무능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지금의 입시 전형만으로도 사교육비가 년 30조에 이르고 있고, 학생들은 새벽부터 밤 12시가 넘도록 책상머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설혹 더 가혹한 줄 세우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하더라도 학생과 학부모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본고사 주장 같은 냉혹찬 주장을 하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들어 온 학생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유럽 45개국의 6000개 대학이 2010년을 목표로 통합하는 볼로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입학생의 성적 우열 가리기에 올인하는 우리나라 대학의 모습은 수치스럽기 그지없다.
본고사와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를 필요로 하는 대학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서울 소재 몇 개 대학에 불과하다. 그 몇 개 대학의 끝없는 욕망을 위해 수천만 국민, 학생과 학부모, 학교에 고통과 절망감을 안겨주는 일은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일이다. 양식과 지각 있는 대학이라고 하면 학생의 진정한 학력과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대학 서열화의 완화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수학, 과학 등의 성적이 세계 최상위를 차지함에도 문제해결력과 흥미도에 있어 최하위에 머무는 것은 강제적인 학습의 결과이다. 전인적 성장이 가능한 다양한 교육활동과 취미활동을 유도하는 입시정책을 강구하는 것이 피폐해진 학생의 삶을 살리고 중등교육도 정상화시키는 길이다.
3불 가운데 고교등급제를 둘러싼 논란은 ‘고교등급제’ 주장의 실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명문대학에 입학한 졸업생의 수에 따라, 수능 평균에 따라 고등학교를 서열화하는 고교등급제는 명분이나 교육적 효과에 있어서도 타당성이 없다. 이러한 고교등급제가 아니라 ‘학교간 교육활동의 차이’로 고교등급제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등학교의 다양한 교육과정과 프로그램의 운영, 학생 평가의 다양화 등 고등학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키워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획일적인 교육과정과 학생 평가방식으로 운영되는 체제에서 학교간 차이가 전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학교간 차이’라는 의미의 고교등급제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교육활동의 획기적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이를 위한 정책의 변화가 선행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교등급제가 교육적 의미도 전혀 없고, 시행할 수 있는 조건도 안되는 상황에서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
3불 정책은 교육정책 가운데에서도 학생들에 줄 충격이 엄청나게 큰 사안이므로 정치적 세몰이 방식으로 진행해서는 절대 안 된다. 3불 정책을 비롯하여 정부와 대학, 고등학교, 학부모와 교육단체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교육정책에 대해 충분한 논의와 설득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는 장기적인 논의를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계속되는 일방적인 주장과 방어는 학생들을 불안하게 하고 사회통합만 저해할 뿐이다. 3불 정책뿐 아니라 2008대학입학제도에 대한 대학과 정부, 교육단체간 이견 역시 합의되지 않는 한 학생들의 희생과 고통만 계속될 것이다. 3불 정책과 대학입학제도 등은 하루 아침에 결론을 내릴 사안이 아닌 만큼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가운데 합의에 이를 때까지 오랜 숙의와 토론의 장 형성이 우선되어야 함을 촉구한다.
2007년 3월 26일
교육과 시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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